허둥지둥 지난한 조연출 삶···'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기사등록 2017/06/22 18:24:19

【서울=뉴시스】 관객참여형 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2017.06.22.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관객참여형 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2017.06.22.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조연출을 따라 지하 1층에서 힘겹게 지상 6층 연습실 스튜디오 하늘에 올라서자 브로드웨이에서 왔다는 한국계 안무가는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인다.

"왜 이렇게 늦었냐" "연출은 언제 오느냐" 등이다. 조연출은 연신 고개를 숙일 뿐이다. 조연출 옆에 있는 신입 스태프는 의아하지만 따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안무가는 느닷없이 "스스로 만든 벽을 부셔야 한다며 '벽을 부수는 춤'을 신입 스태프에게 가르친다. 신입 스태프 30명은 나란히 춤을 따라한다.
 
22일 오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올해 관객참여형 공연의 하나로 선보이는 관객참여형 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사전 최종 리허설 현장.

대학로 예술극장 백스테이지를 포함해 극장의 전역을 이동하면서 진행되는 새로운 '백스테이지 + 극장투어' 형식의 공연이다. 2013년 초연한 작품인데 사전 입소문을 타고 이날 저녁 공연부터 25일까지 공연이 모두 매진됐다.

RPG는 '롤 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의 약자. 유저가 게임 속 캐릭터들을 연기하며 즐기는 역할 수행게임을 공연으로 가져온 것으로, 관객들이 바로 신입 스태프다.

관객들은 덕분에 2시간 동안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까지 구석구석 탐방하며 극장의 속살을 엿볼 수 있다. 캐릭터를 연기하며 공연제작과정까지 경험할 수 있는 역할 수행놀이를 하게 된다.

작품의 회당 관람 인원은 120명. 각기 다른 조연출을 만나 30명씩 네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동선으로 흩어져서 공연을 관람한다. 총 4곳을 둘러본다. 순서는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곳을 돌아보게 된다.

회의실에서는 연출과 작가의 제안으로 성희롱 예방을 위한 10가지 수칙 교육을 진행해야 하는 극장 관계자들이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여성 인턴은 여성 과장에게 성폭력·성희롱의 사례를 들며 또박또박 할 말을 다하고 여성 대리는 그 사이에서 어찌해야 할 지 몰라 한다. 그곳에서도 조 연출은 찬밥 신세.

카페에서 연출과 작가는 드잡이까지 할 분위기로 격하게 싸우고, 작가는 결국 연출에게 화를 내며 현장을 떠난다. 조연출은 작가를 따라가지만 하릴없을 뿐이다. 분장실에 있는 배우들에게 밥을 시켜 주는 일도 쉽지 않다.

【서울=뉴시스】 관객참여형 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2017.06.22.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관객참여형 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2017.06.22.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email protected]
관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기운을 북돋아주고 자신의 연극 인생을 조연출에 투영하는 김슬기, 황선화, 조한나, 손은지 네 배우의 끼 덕분에 조연출 캐릭터는 현실감과 생동감을 얻었다. 

공연이 당장 내일인데 정해진 것 없이 의견을 조율하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허둥지둥하는 조연출의 모습은 지난한 삶을 사는 우리와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텔레파시 게임, 연상게임, 스피드 게임 등 각 스팟에서 게임을 하며 동선을 따로 돌던 네 팀은 대극장 무대 위로 모두 모이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안무가가 말했던 스스로 쌓은 벽을 부수는 순간이다. 관객들 아니, 신입 스태프들이 회의실에서 전지에 '현재 자신을 가로 막는 벽'을 적어놓았던 것이 화면에 뜨고 관객들은 그것을 향해 고무공을 던진다.

이후 벽이 부셔지고, 관객들은 신나게 춤을 추며 난장을 벌인다. 스튜디오 하늘에서 안무가에게 배운 춤도 이 때 선보여야 한다. 120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 위를 마음껏 종횡무진 할 때, 내 안의 벽이 무너진 듯 쾌감이 느껴진다. 이날 프레스콜에서는 대학로에서 핫한 여배우로 떠오른 뮤지컬 '찌질의 역사'의 김히어라도 마음껏 뛰어다녔다.

압권은 진짜 504석짜리 객석을 가렸던 천막이 올라가고 객석에서 진짜 배우와 스태프들이 관객들에게 환호를 해줄 때 위로가 찾아온다. 스크린에 진짜 스태프와 배우들의 이름 뒤에 관객들의 이름이 나열 될 때 '내 인생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나지'라는 생각에 고개도 절로 끄덕여진다.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는 세계적으로 보편화·확산되고 있는 공연 형식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er)'을 떠올리게 한다. 무대와 객석이 사라진 형태다. 해외에서는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가 대표적이다. 호텔을 셰익스피어의 맥베드라는 가상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지난해 유럽에서 주목받고 있는 룬달 & 세이틀(Lundahl & Seitl)이 지난해 프로젝트 박스 시야에서 체험극 '엘레지'를 펼치기도 했다. 블랙박스 형태의 공간에서 관객들은 가이드의 물음에 예스 또는 노, 라고 답하며 공연에 참여했다.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는 하지만 이런 세계적인 흐름에 영향을 직접 받은 작품은 아니다. 대학로의 핫한 김태형, 황희원 연출과 지이선 작가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황 연출은 대학로에서 '지탱 콤비'로 불리며 찰떡궁합의 호흡을 과시한 김태형·지이선 작가의 조연출을 오래한 경험을 극에 불어넣었다.

연극적인 고민이 더 짙고 좀비까지 등장한 3시간 짜리 2.0버전을 거쳐, 기존 초연한 버전을 업그레이드시켜 이번 1.7 버전을 내놓았다.
 
【서울=뉴시스】 관객참여형 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2017.06.22.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관객참여형 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2017.06.22.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email protected]
프레스콜 뒤 만난 황희원 연출은 "제 입장을 투영한 조 연출을 통해 보여드리고자 한 건 우리가 다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라며 "예술(연극)이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지만 일하면서 겪는 애환은 관객들과 같다는 점을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감을 느끼는 듯,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날 공연에 참여한 서울에 산다는 2년차 회사원 김모씨는 "조연출이 내 모습처럼 느껴지더라"고 말했다.
 
김태형 연출은 "객석과 무대가 분리돼 제4의 벽이 존재하는데 관객이 공연 체험을 하면서 그것이 부셔지기를 바랐다"며 "동시에 삶의 벽이라는 한계와 아픔들 용감하게 두드려볼 수 있는 용기를 줬으면 했다"고 말했다.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는 각 극장 공간과 그 안에서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밀화를 잘 그려낸다. 마지막 대극장 무대에 그것들이 뭉쳐 극장 그리고 삶이라는 거대한 풍경화를 만들어내는 묘가 발휘된다.
 
지이선 작가는 "조연출의 하루가 처음 이야기의 출발이었는데, 야단도 맞고 울기도 하지만그럼에도 공연에 대한 꿈을 놓지 않는 조연이 우리 모두와 비슷하지 않을까 했다"고 했다. "공연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을 통해 극장을 새로 들여다보는 동시에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라는 공연 제목처럼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삶을 져가기를 바랐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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