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 "직접 민주주의, 작정하고 시민극으로 만들었다"

기사등록 2017/08/23 18:43:46

【서울=뉴시스】 오동식·명계남·이윤택, 연희단거리패 '노숙의 시' 간담회. 2017.08.23.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오동식·명계남·이윤택, 연희단거리패 '노숙의 시' 간담회. 2017.08.23. [email protected]
■연극 '노숙의 시'···명계남·오동식 출연
美 에드워드 올비 '동물원 이야기' 각색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문재인 대통령도 '직접 민주주의'를 강조하셨잖아요. 이제 저도 직접 연극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감히 말씀드린다면, '시민극'이죠. 시민들의 각성 또는 시민들과 소통을 시도하는 시민극을 하고 싶어요."

이윤택(65) 극단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23일 오후 명륜동 30스튜디오에서 열린 연극 '노숙의 시' 기자간담회에서 "연극이 미학적 근거, 틀 속에서만 있어서 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연극이 이제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 작정하고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연극계 게릴라로 통하는 이 감독은 박근혜 정부에서 대표적인 연극계 블랙리스트 인사였다. 지난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문학창작기금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도 탈락, 당시 연극계에 불던 '외압'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2015년 말 위탁 운영한 부산 기장군의 어린이 극장 '안데르센 극장'이 개관 한 달여 만에 문을 닫으면서 또 다른 의혹도 싹을 틔웠다.

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대선에서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당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지지 연설을 했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블랙리스트에 대한 진상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 감독은 작심하고 이제 말을 하고 나서겠다고 했다. 그는 "최소한의 연극성만 살리고 말을 쏟아 붓겠다"면서 "사건도 극적 구성도 필요 없고 따발총처럼 쏘겠다"고 했다.

'노숙의 시'는 미국의 거물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1928~2016)의 '동물원 이야기'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다. 제리와 피터라는 두 남자가 한 벤치에서 벌이는 이야기를 담은 2인극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와 고독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을 고스란히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 예술감독이 영미권의 모던한 희곡을 번안, 각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26세 때 이 연극을 처음 봤다는 그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후 평생을 두고 한번은 연출해야 할 작품이라고 점찍어 둔 채 이제야 연출을 하게 됐다.

구성은 그대로 뒀지만 사실상 재창작에 가깝다. 미국과 한국의 현실이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원작은 1950~60년대 히피, 로큰롤 세대 이야기에요. 그 세대랑 우리 세대는 다르죠. 미국은 역사가 짧다 보니 서사적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크지 않아요. 희곡 자체는 뛰어나지만 저희에게 담론을 안겨주기는 힘즐죠. 반면 역사가 반만년에 분단이 된 우리는 엄청난 역사적 스트레스에 얽매여 있죠.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적인 내용에 집중했어요."

【서울=뉴시스】 이윤택 예술감독, 연희단거리패 '노숙의 시' 간담회. 2017.08.23.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이윤택 예술감독, 연희단거리패 '노숙의 시' 간담회. 2017.08.23. [email protected]
덕분에 연극에는 남북으로 갈라진 이야기부터 간첩, 빨갱이, 박정희 정권 때 강제 해직된 '동아일보' 출신 기자들이 결성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등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덕분에 본래 50분짜리 극이 1시간50분으로 늘어났다.

이 감독은 "민주사회 전에 쫓겨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라면서 "'노숙의 시'에는 실화가 많이 들어가 있어요. 동베를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요"라고 전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문재인 정부로 바뀌면서 지난해와 올해 한국사회가 생긴 엄청난 큰 변화도 작품에 자연스레 반영됐다.

시민혁명으로 통하는 촛불 집회가 그 중 하나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촛불이라는 것이 기적의 장면이었다"면서 "미국, 일본은 물론 독일까지 놀랐죠. 이미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개인주의가 만연해 공동체라는 광장이 만들어지기가 힘들거든요.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서 시민이 세상을 바꾼다는 걸 상상하기 힘든 기적"이라고 했다.

아울러 올해 광화문극장에 세워졌던 공공극장 '블랙텐트'에서 연희단거리패의 굿극 '씻금'을 공연한 것도 이번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 중 하나다.

"저는 아시다시피 좌파도 아니고 민중민족주의도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근데 광화문 블랙텐트에 함께 해달라고 해서 공연을 해봤는데 많은 연극 관객들이 오더라고요. 극장 공연보다 진지한 관객들을 만나면서 '연극이라는 것이 이래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이 엔터테인먼트화가 되고 연예인들이 대거 나오고 있는데 나이든 사람으로서 저라도 무거운 담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죠."
 
1970년대가 한국 연극의 전성기이고 연극인들이 대접받던 시기라며 "당시는 연극이라는 것이 재미보다는 대단히 진지하게 파고들며 세상에 대해 말을 거는 담론으로서 연극이 사회적 창이 됐는데 그 때를 기억하며 만들고 싶다"고 했다. 다만 스트라빈스키, 핑크 플로이드 등 잘 알려진 음악을 삽입해 말의 강경함을 유화시켰다.

이번 작품에는 또한 평소 정치적인 성향을 명백히 밝혀 한때 '폴리테이너(politainer)'의 대표주자로 통한 명계남이 출연해 눈길을 끈다.

【서울=뉴시스】 연극 '노숙의 시' 간담회. 2017.08.23. (사진= 연희단거리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노숙의 시' 간담회. 2017.08.23. (사진= 연희단거리패 제공) [email protected]
이 감독이 그를 "오랫동안 소위 말하는 정치 선동가"라고 소개하자 그는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 감독은 명계남이 스스로 제작자로 나서 만든 모노드라마(1인극) '콘트라베이스'에서 그가 혼자 2시간 동안 무대를 쥐락펴락하는 걸 보고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 감독은 "성이 명씨라 명배우가 아닌 정말 명배우"라고 치켜세웠다.
 
이 감독은 하지만 때를 기다렸다. 자신이 블랙리스트로 걸려 있어서 명계남과 같이 연극을 한다면 정치한다고 수군거릴까봐 대신 채윤일이 연출하고 명계남과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가 함께 출연한 오스트리라 작가 페터 투리니 작품이 원작인 '황혼'을 먼저 공연했다.

'노숙의 시'에서는 작심하고 명계남의 정치적인 이미지를 활용한다. 명계남이라는 노년의 배우을 선정하고, 명계남이라는 배우가 이 한국사회 속에서 지니는 특성을 고스란히 작품에 투영시켰다. 연희단거리패의 '백석 우화'의 백석 역으로 유명한 배우이자 최근 국립극단의 기획 공연 '한민족디아스포라 전'에서 '용비어천가'를 연출해 호평 받은 연출가이기도 한 오동식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넣어 명계남과 호흡을 맞춘다.

명계남은 "정치적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저도 시민이었지만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라 다르게 받아진 부분이 있다"면서 "지금은 없어진 대학로 변두리의 게릴라극장에서 '황혼'을 끝내면 김소희 대표랑 광화문까지 걸어가서 촛불집회에 참여하고는 했어요"라고 돌아봤다. 
 
연세대 1학년 재학 시절 연극반 활동을 할 때 이대 앞 카페에서 처음 티켓 값을 받고 연극한 작품이 '동물원 이야기'라는 인연도 전한 명계남은 "덕분에 '노숙의 시'가 처음 하는 연극 같은 기분이 들어요. 명배우고 뭐고 수식을 떠나 처음 하는 기분으로 해 신이 난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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