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하라'가 한국 페미니즘의 수준인가…"일베와 경쟁"

기사등록 2018/07/12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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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커뮤니티나 집회 현장에서 마구잡이 쓰여
혜화역 시위 급기야 "문재인 재기해" 구호 파장
스튜디오 실장 투신에도 '재기했네' 조롱 난무
'한남들이 재기하는 만큼 세상 깨끗해지는 것'
"패륜 집단이 한국 페미니즘 선봉으로 간주돼"
"사회적으로 절대 놓치면 안 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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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심동준 기자 = 홍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에서 촉발된 남녀 갈등이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여성 커뮤니티나 집회 현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재기'라는 표현이 극단적 혐오와 생명 경시 풍조를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해당 문구에는 자살을 희화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최근 유튜버 양예원(24)씨의 노출 사진 유포 사건에 연루된 스튜디오 실장 정모(42)씨의 투신이 일어나면서 표현의 도덕성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스튜디오 실장 정씨가 투신한 것으로 알려진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재기하다'라는 문구에 대한 지적이 많아졌다.

 '재기하다'는 이미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서 '불편한 용기' 주최로 열린 여성 집회에서 "문재인 재기해"라는 구호가 나오며 파장을 일으킨 상황이다. 주최 측은 '재기하다'는 문구가 사전적인 의미에 불과하다는 해명을 내놓았으나 반대 측에서는 신빙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지난 9일 정씨의 투신이 발생하고, 이에 대해 다시 '재기했다'라는 식의 표현이 다수 등장하면서 격론이 벌어지는 양상이다. 정씨는 미투 폭로의 연장선상에서 최근 가장 주목 받은 사건 가운데 하나인 양씨 사진 노출 사건의 피의자였다.

 가령 정씨 투신을 두고 일부 여성 커뮤니티 등에는 "찔려서 재기한 주제에 억울하다니" "억울해서가 아니라 지은 죄를 감당 못해서 재기한 것" "경찰 몰래 몸을 던지자, 한남아 재기해" 등의 글들이 올랐다.

 '재기'라는 표현은 정씨 이전에 미투 폭로의 대상으로 지목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한남들이 무서워서 줄줄이 재기한다" "한남들이 재기한 만큼 세상이 깨끗해진 것" "죄 저지른 것을 들키면 재기하네" 등과 같은 표현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해당 문구의 어원은 지난 2013년 고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가 마포대교 아래로 떨어져 숨진 사건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실제로 '마포대교에서 재기' '재기한 불법촬영남' '재기 따라 가다' '무고죄로 재기하다' 등의 용례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아울러 '재기하다'라는 문구가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에서 자주 쓰는 표현인 '운지'라는 용어와 함께 언급되는 일이 잦다는 점도 논란이 되는 지점이다. 운지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을 조롱하는 의미가 담겨 있어 지탄을 받은 용어다.

 전우용 한양대 연구교수는 9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워마드를 중심으로 한 일부 여성들이 집회 장소에서 문재인 재기해를 외친 건, 그들의 생각이 일베와 똑같다는 것을 드러낸 데 불과하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문제는 저 패륜 집단을 여전히 한국 페미니즘의 선봉이자 전위대로 간주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라며 "설령 현재의 한국 사회가 성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패륜 집단을 전위부대로 삼은 본대가 승리할 수는 없다"라고 적었다.

 이준석 바른미래당 전 서울 노원구병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후보도 10일 페이스북에 "나는 성재기씨한테 맨날 욕을 퍼먹었던 사람이지만 그래도 사고로 세상을 떠난 분을 은어화하는 것은 정말 황당하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트라우마가 있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성재기씨의 투신행위를 연계하는 것은 특히나 가혹한 정치적 의사표현이라 본다"라고 주장했다.

 온라인상에서도 "화나서 '문재인 재기해'를 말할 수 있다. 대신 여자일베가 됐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보통 사람은 그런 말 쓰지 않는다 일베류와 싸울 때나 쓰고 집회 망치지 마라" "재기해 단어가 거북하다" 등의 반응이 나오고 있다.
 반면 '재기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자유로운 의사 표시의 한 방식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지방선거 서울시장 녹색당 후보로 나섰던 신지예씨는 9일 한 방송에 출연해 "여성들이 당해온 것에 비하면 그렇게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며 "저런 퍼포먼스, 과격함이 과연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밖에 "입에 담기도 끔찍한 수많은 여성혐오 욕들은 놔두고 '재기해' 정도의 온건한 단어를 문제 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한남들은 아직도 여자 납치하고 추행하고 폭행하는데 '재기해'만 문제 삼는다" 등의 반응이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재기하다'와 같은 표현에 생명을 경시하는 세태가 반영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표현의 성격도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쪽에 치우쳐 있으며, 주된 양태 또한 단순하고 극단적인 방향성을 보인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젠더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에 대한 반응들을 보면 최근 이성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들이 많다"라며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고 실질적인 개선 방향을 논의하기보다는 쌓여 있던 분노를 감정에 치우쳐 외부로 표현하는 단계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자살을 희화화하거나 심지어 조장하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의 인권도 제대로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으로 사회가 치닫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라며 "생명에 대한 존중은 좌우·성별·인종 등 어떠한 차이가 있더라도 사회적으로 확고하게 놓치지 않아야 할 가치"라고 강조했다.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도 "생명을 경시하는 문화가 만연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본다. 재미로 말할수는 있겠으나 자살이 주는 여파는 크다"라며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에도 사회를 관통하는 현상처럼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s.wo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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