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연출 김정 "극장은 소모품, 부숴야 생각의 전환 가능"

기사등록 2018/10/22 14:18:48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지난 몇 년 간 연극계는 혹독한 겨울을 지내면서도 희망의 싹을 틔웠다. 대표적인 싹이 극단 '프로젝트 내친김에'의 김정(34) 연출이다.

김 연출은 지난해 제54회 동아연극상에서 작품상, 희곡상, 신인연출상 등 3관왕을 차지한 연극 '손님들'로 스타덤에 올랐다. 고연옥(47) 작가가 쓴 작품으로 김 연출의 첫 창작극 연출작이다.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부모를 가장 큰 문제로 생각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무력감과 분노로 가득한 부모와 그 슬하에서 학대받는 소년을 통해 바라본 불행한 가족의 초상이다. 이 작품은 중국과 일본 관객도 만나며, 소통에 성공했다.
 
고 작가와는 올해 초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한 '처의 감각'으로 다시 차진 호흡을 과시하며 대학로의 새로운 콤비로 떠올랐다.

이후 김 연출의 주가는 계속 올라갔다. 지난여름에는 연출가 하수민과 연출 2명에 배우 임영준 1명이 주가 되는 연극 '임영준햄릿'으로 실험도 했다. 최근 공연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두산연강재단의 제9회 두산연강예술상에서 공연부문 수상자로 선정되며 경력에 방점을 찍었다.
'손님들'
'손님들'
김 연출은 "제가 별로 한 것이 없는데 '이 상을 받아서 어떡하나'라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어요"라면서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까' '어떤 작업자가 될 것인가'라는 막연한 고민을 더 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고민은 지난해 '손님들'로 호평을 들은 후 올해 4월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처의 감각'을 올리기 직전 정점을 찍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두려움이 덮쳤어요. 5일 넘게 빈 객석에 앉아 무대를 멍하게 바라봤죠. 그러다 손바닥 뒤집듯이 에너지가 터졌는데 몸과 마음이 많이 다쳤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했다'는 생각도 들었죠. 완성도와 만족감과는 다른, '그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을 모두 쏟았구나'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총 17장이었는데 17가지 공연을 만든 기분이 들었죠."

최근 좋은 콤비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는 고 작가와는 2013년 한태숙(68)이 연출한 국립창극단의 '단테의 신곡'을 통해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김 연출은 한 연출이 이끄는 극단 물리의 조연출이었다. "감히 고 작가님과 콤비라고 불리는 건 맞지 않아요. 이미 작가로서 세계관계이나 극작 스타일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른 예술가입니다. 그 분만큼 연극을 이해하고 연극 자체를 존중하는 분은 드물어요."

김 연출은 2015년 자신의 연극 경력과 인생을 바꾼 사건을 겪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자체 기획한 공연 프로그램 '팝업 시어터'에 연극 '이 아이'로 참여했는데, 당시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공연이 중단되자 그는 시위를 벌이며 맞섰고 젊은 연극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 때 연극이라는 것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됐어요. 스스로 창작자라고 이야기했지만, 먼 거리에서 단지 예술을 누린 사람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됐죠. 당시 제게 스스로 떳떳하지 못했거든요. 제 이야기를 못하게 밖에서 막는다는 두려움보다 그 이야기를 밖으로 내보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 더 부끄러웠거든요. '이 아이' 이후 생각보다 큰 흐름에 휩싸이게 됐고, 제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고민하게 됐죠. 나중에 그 흐름 속에서 빠져나와 보니 이미 (연극계나 사회적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더라고요."
'처의 감각'
'처의 감각'
이제는 연극이 자신의 일이 된 것 같다. "해야 될 책임감이라고 할까요. 이전까지는 책임으로 생각을 안 했거든요. 이제 창작자로서 느낌이 들어요."

경북 안동 출신인 김 연출은 스스로를 '인문계 시골 촌놈'이라 불렀다. 본래 연극계에서 일하는 것을 꿈꾸지는 않았다. 다만 따분한 공부를 하기 싫다는 이유로 인문계에서 가장 예술계쪽으로 기울어 보이는 동국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학교 근처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안내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뮤지컬 '그리스' '캣츠' '지킬앤하이드' 등을 접하면서 공연에 빠져 버렸다. 전혀 모르던 세계에 갑작스럽게 노출됐으니, 충격이 컸다. 특히 한 작품을 계속 반복해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공연이 클라이맥스로 다가가는 과정을 자연스레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계를 잠시라도 맛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하우스 매니저 일을 알아보다 닿은 연으로 한태숙 극단 물리 대표의 조연출이 됐다. 2009년 명동예술극장 재개관작이자 최인훈 희곡이 바탕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가 그의 첫 조연출작이다. 이후 물리 작업과 함께 김재엽(45) 연출, 김동현(1965~2016) 연출의 '그을린 사랑' 등의 작업에 참여하면서 수차례 희곡을 읽고 분석하며 공부했다.

현재는 자신을 포함해 '한태숙 키즈'들과 함께 꾸린 극단 프로젝트 '내친김에'를 통해 활발히 작업 중이다. 이들은 눈치를 보지 않은 젊은 예술가라는 점이 큰 장점이다. 김 연출은 두산연강예술상 시상식에서 "부당한 것이랑 싸우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는 수상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공식적인 자리잖아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우선 스스로를 다짐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또 하나는 당당하기보다 솔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면 내가 왜 연극을 해야하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동시에 김 연출은 두산연강재단이 소유한 두산아트센터가 젊은 창작자를 위해 문을 활짝 열어주면 '깜작 놀랄 만한 작품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도 내비쳤다. "극장이라는 공간은 소모품이 돼야 해요. 때려 부수든, 과감한 소모를 통해 생각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거든요"라며 웃었다. 

자신의 생활과 작업에 대한 경계선을 짓지 않고 부딪히며 살아온 김 연출은 최근 결혼을 하면서 일상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다. 생활과 작업에 대해 현명하게 분리할 수 있는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작업 방식도 점차 성숙해지고 있다. 2016년 젊은 연출가들의 예술협업운동인 '화학작용2'에서 선보인 '꿈'을 11월 8~18일 대학로 나온 시어터에 다시 올린다.

12월 펼쳐질 예정인 '사계절 연극제'에서는 헨리크 입센의 '민중의 적'을 원작으로 하는 새 작품을 내놓는다. "'예술이라는 장르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어요. 사회적인 금기 부분에 대해 더 들여다보고 싶죠. 모두가 자유롭다고 믿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왜 이렇게 금기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예술도 입에 담고 표현하기에 두려운 것이 많죠. 아직 저도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위험한 질문'이 무엇일까 고민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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