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백년과 여성]②박자혜는 누구…조선 궁녀 출신 항일 '간우회' 결성

기사등록 2019/02/20 06:00:00

어린 나이에 궁으로 보내져 견습 생활

일제 강점기로 궁을 나오며 세상 접해

【서울=뉴시스】박자혜(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서울=뉴시스】박자혜(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서울=뉴시스】김온유 기자 = 박자혜는 1895년 12월11일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이었으며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해방 이후까지 생존했던 상궁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자혜는 4~9세에 입궁한 나인으로 전해진다. 나인은 궁중에서 왕족의 시중을 들던 여관(女官)을 뜻한다. 일부 사학자들은 박자혜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궁으로 보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나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18세나 19세에 관례를 치르기 전까지 견습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에 따라 박자혜는 대한제국이 혼란을 겪었던 1900년대에 유년 시절이자 견습 나인 과정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인들은 출신 성분에 따라 하는 일이 달랐다. 그중 중인 출신은 왕을 모시는 '지밀', 바느질을 담당하는 '침방', 자수를 놓는 '수방' 등을 담당했다. 박자혜 역시 중인 출신이기에 이중 하나의 업무를 수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자혜가 궁중 생활을 벗어나게 된 것은 1910년 일제 강점기가 찾아오면서다. 1911년 1월31일 일제는 궁내부 소속 고용원 340여명과 원역(員役, 아전) 326명을 해직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나인으로 살았던 박자혜가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첫번째 갈림길이 찾아온 순간이다.

조선의 궁녀로서 그녀는 다분히 유교적 가치관을 습득하며 자랐다. 그런 그녀가 궁을 나와 처음으로 근대적인 삶을 접하게 됐다. 숙명여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숙명여학교는 1906년 왕실 후원으로 지어진 학교다. 1911년 숙명여학교 기록부를 보면 기예과에 박자혜가 입학한 것으로 나와있다. 이곳에서 박자혜는 궁에서 배울 수 없었던 산술과 일어독본 등 새로운 학문과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며 견문이 넓어지게 됐다.

숙명여학교 기예과에서 배운 지식만으론 안정적인 취업까지 해내기 부족했다. 박자혜는 기예과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에 들어갔다. 조산부양성소를 나오면 후에 조산원을 개원할 자격도 주어졌다.

당대에는 여성이 할일이 많지 않았다. 바느질 삯을 받거나 아이를 돌봐주는 일, 굴을 따는 일, 기생 등이었다. 박자혜는 '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 조산부양성소를 택했고 이곳에서 해부학과 간호, 육아, 소독법, 간이생리학 등을 배웠다.
【서울=뉴시스】조선총독부 의원(옛 대한의원)
【서울=뉴시스】조선총독부 의원(옛 대한의원)
이후 박자혜는 조산부 자격증을 얻고 1916년경 조선총독부 의원 산부인과에 간호사로 취업한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 때문에 조선의 궁을 나와 나인의 직분을 벗어야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는 그녀의 삶을 또 다시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독립을 외치다 스러져가는 조선인들을 치료하면서 그녀는 잊고 지냈던 애국심이 끓어올랐다. 일본을 위해 일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도 느꼈다.

박자혜는 이후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조직인 간우회를 만들고, 의원 내 의료인들에게 일제 항거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었다.

"일본을 위해 일하는 것이 부끄럽다. 일본의 간호사는 안 하겠다."

조선의 궁녀로 키워진 그녀는, 일제의 산부인과 간호사가 됐지만 결국 대한 독립의 산파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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