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삼식 "말·행위 끝에 음악 날아오르다"···오페라로 재탄생 '1945'

기사등록 2019/09/17 14:03:28

최우정 작곡, 국립오페라단 초연

배삼식 극작가
배삼식 극작가
이재훈 기자 = "연극을 쓰면서 최종적으로 대면하고 싶었던 순간은 어떤 말이나 행위가 필요 없어지는 순간, 즉 말과 행위가 소용을 다하는 순간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그 순간을 만들어낼까 고민했는데 음악이 바로 그 자리에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죠."
 
극작가 배삼식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글에 대한 진심과 음악에 대한 겸손함을 안다. 각급 상을 휩쓸며 연극의 소용을 다한 '1945'가 오페라로 다시 태어나는 마법이 빚어진 이유다.
 
배 작가는 17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연습동 N스튜디오에서 열린 오페라 '1945' 간담회에서 "음악적인 구조를 만들어 가는데 텍스트가 방해되지 않도록, 대본을 옮기는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국립오페라단이 27, 2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초연하는 오페라 '1945'는 2017년 국립극단이 초연한 배 작가의 연극 '1945'가 바탕이다.

연극 '1945'는 해방 직후인 1945년 만주에 살던 조선인들이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머물렀던 전재민 구제소를 배경으로 당시 민초들의 삶을 그렸다. 국립오페라단이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오페라로 제작했다.

연극은 다양한 앙상블이 돋보였는데 조선인 위안부 '분이'가 이야기 중심축에 있었다. 그녀는 전재민 구제소 사람들에게 일본인 위안부 '미즈코'를 벙어리 동생 순이라고 속인다.

결국 미즈코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하지만 배 작가는 빤한 결론을 내지 않는다. 악한 일본인과 착한 조선인으로 대변되는 뻔한 선악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최우정 작곡가
최우정 작곡가
만주의 전재민 구재소와 일본인 위안부는 그간 우리 기억이 미처 머물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기록이다. 2017년 배 작가가 연극 '1945'를 통해 이를 짚어내면서 우리 역사를 환기했다.

'하얀앵두' '벌' '먼 데서 오는 여자' 등 손꼽히는 수작 연극을 써온 배 작가는 훌륭한 기술자(技術者) 겸 기술자(記述者)다. 수공업적인 장인이라는 뜻이 내포된 '플레이 라이트(play wright)' 영역에서 매끈한 극작법, 즉 기술(技術)을 갖고 있는 작가다. 아울러 우리의 기억과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기술(記述)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임한다.

연극 '1945' 대본을 개작해 쓴 오페라 '1945' 대본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전 작품들처럼 인물들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자 했다. 최대한 그들의 삶에 구체성을 담고자 한 까닭이다. 섣부른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배 작가의 특기할 만한 점이다.

배 작가는 "인간이 문명 속에서 무리 지어 사는 한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 판단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 "그렇지만, 한 인간이 구체적인 삶 앞에서 설 때 가치 판단이라는 틀이 얼마나 성긴 것이고 때로는 억압과 폭력이 될 수 있는지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배 작가는 이 작품을 쓰면서 '자비'라는 말을 떠올렸다고 했다. "따듯한 슬픔, 자애로운 슬픔을 인간에게서 듣고 싶었고 발견하고 싶었다"고 했다.

오페라 대본 작업은 처음인 배 작가는 "오페라 배움이 일천하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음악극 '적로'에서 호흡을 맞췄던 최우정 작곡가 덕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했다.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이미 자신의 음악적 구조를 가지고 계셔서 지루한 토론 없이도 내용을 바꾸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노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고 덧붙였다.

최 작곡가는 연극 '1945'의 오페라화를 국립오페라단에 제안한 주인공이다. 배 작가의 희곡이 오페라 대본이 완성된 작년 12월 전부터, 최 작곡가는 이 작품의 음악에 대해 구상해왔다.

음악극 '적로'뿐 아니라 연극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뮤지컬 '오필리어', 오페라 '달이 물로 걸어오듯' 등 여러 장르의 극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최 작곡가는 이번에 자신의 장기를 쏟아 붓는다.
고선웅 연출(왼쪽), 정치용 지휘자 ⓒ국립오페라단
고선웅 연출(왼쪽), 정치용 지휘자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1945'에는 최 작곡가가 만든 음악뿐 아니라 기존에 있는 다양한 음악들이 나온다. 작품의 배경이 된 당시 1930~1940년대 유행했던 창가와 군가를 비롯 '울리는 만주선'과 같은 트로트, 일본 전통 대중가요의 하나인 엔카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와 전래동요 '두껍아 두껍아' 등의 선율이 인용되기도 한다.

최 작곡가는 "공감할 수 있는 선율, 음악적 완성도를 다 집어넣으려고 했다"면서 "외가가 평안북도 철산인데 어머니를 통해서 역사적 질곡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어요. 그래서 '1945' 이야기에 사용해야 할 음악들이 몸 속에 스며들어 있었죠. 음악적이고, 완성도 높은 대본이 음악 작업을 하는데 큰 역을 했습니다"라고 전했다.

배 작가와 최 작곡가 외에 스태프들이 모두 공연계 어벤저스로 꾸려졌다. 연출은 뮤지컬, 연극, 창극을 넘나다는 ‘공연계 미다스 손’으로 불리는 고선웅이 맡는다. 뮤지컬 '아리랑', 연극 '한국인의 초상'과 '푸르른 날에' 등 전작에서 역사와 개인의 얽힌 관계를 풀어낸 그는 "뼈 아픈 이야기지만 뜨겁고 영광스럽게 하자고 배우, 스태프들에게 이야기했다"면서 "다양하고 좋은 멜로디도 많고 익숙한 것도 많아서 찡하면서 재미있게 볼 수 있다"고 했다.

2016년 오페라 '맥베드'를 통해 오페라 연출에 데뷔했던 고 연출은 "제가 음악적으로 못하는 부분을 다른 분들이 잘 커버해주신다"면서 "제가 하는 것은 스태프, 배우들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라고 흡족해했다.
 
지휘봉은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정치용 예술감독이 든다. 평소에 한국 창작 오페라에 관심이 많았다는 정 지휘자는 "서양 오페라 못지않게 한국 작품 중에서도 예술성을 느끼면서 대중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작품이 탄생했으면 했는데 '1945'를 만나면서 그런 바람이 이뤄진 것 같다는 생각"이라고 기대했다. "일제시대, 위안부 문제가 섞여 있는 굉장히 큰 주제인데 깊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라고 부연했다.

이와 함께 무대 이태섭, 안무 정영두, 조명 류백희, 의상 김지연 등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스태프들도 힘을 보탠다. 소프라노 이명주와 김순영이 각각 분이와 미즈코를 맡았다. 국립합창단,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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