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5일 별세한 배우 안성기(74)는 배우로 산 70년 간 영화 140여편을 남겼다. 한국영화 역사이자 상징이었던 고인은 2017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연 데뷔 60주년 특별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영화 8편을 꼽은 적이 있다.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만다라'(1981) '고래사냥'(1984) '하얀전쟁'(1992) '투캅스'(1993)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실미도'(2003) '라디오 스타'(2006)다. 이들 작품은 단순히 안성기의 대표작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한국영화 변화와 혁신의 길목에 있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안성기가 아꼈던 이 영화들을 하나씩 짚어봤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성인 연기자로 화려한 도약

이장호 감독이 1980년 내놓은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안성기가 성인 연기자로 복귀하며 찍은 첫 번째 영화였다. 1957년 데뷔해 1968년까지 아역 배우로 활동한 안성기는 이후 연기를 중단하고 학교·군대를 마치고 잠시 회사원 생활을 하다가 10여년만에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이때 선택한 작품이 바로 '바람 불어 좋은 날'이었다.
상경한 세 청춘의 암울한 현실과 끝모를 방황을 코믹한 터치로 그려낸 이 작품에서 안성기는 도시 빈민층 청년 덕배를 맡아 녹슬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주며 성인 연기자로 자리 잡았다. 배우로 새출발하는 건 물론 그가 1980년대 청춘의 아이콘으로 부상하는 데 초석이 돼준 영화이기도 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7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를 지배했던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 시대 막을 내린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이 작품의 성공은 리얼리즘에 기반해 사회비판적 성향을 띈 영화들이 득세하는 데 큰 영향을 줬고, 안성기와 함께 새로운 세대 배우들을 영화계 중심으로 올려놨다.
◇'만다라' 청춘스타 그 이상으로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나오고 그 이듬해 나온 '만다라'는 안성기가 단순히 청춘스타가 아니라 진짜 배우라는 걸 각인했다. 젊은 승려 법운을 맡은 안성기는 법운이 구도의 길에서 갈등하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과정을 성공적으로 표현해 호평 받았다. 말하자면 '만다라'로 안성기는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하며 자신이 떴다 지는 스타 배우가 아니라 진지하게 고뇌하는 연기파 배우라는 걸 영화계에 각인했다.
이와 함께 '만다라'는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출가인 임권택 감독이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본격적으로 펼쳐보이기 시작한 작품이기도 하다. 임 감독은 안성기와 함께 독보적인 미장센과 사유의 깊이로 한국 불교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끌어냈다.
◇'고래사냥' 청춘과 반항 그리고 흥행

'만다라'로 연기력을 증명한 안성기는 배창호 감독이 1984년 내놓은 '고래사냥'으로 한국영화 최고 스타 중 한 명으로 발돋움 했다. 이 작품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소심한 대학생 민우가 말을 하지 못하는 여자 춘자를 고향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부랑자 병태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은 로드무비다. '고래사냥'은 당대 청춘영화의 정점이자 반항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으로 평가 받았고, 높은 완성도를 인정 받은 건 물론 흥행 면에서도 거대한 성공을 거뒀다.
민우를 연기한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연기력과 함께 흥행 파워까지 갖춘 배우라는 걸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배창호-안성기 콤비 시대를 열었으며 한국영화계 청춘영화 붐을 이끌기도 했다. '고래사냥'은 검열의 시대가 끝나고 영화계가 활력을 되찾아가는 시기에 젊은 세대 감수성을 자극하며 폭발적인 지지를 끌어내 한국영화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하얀전쟁' 금기에 도전하다

정지영 감독이 1992년 발표한 '하얀전쟁'은 예술가 안성기의 야심을 엿볼 수 있는 영화였다. 이 작품은 베트남전 참전군인 출신 소설가 변진수의 이야기를 그렸고, 안성기는 변진수를 맡아 전쟁이 만들어낸 극심한 인간성 상실을 표현하는 데 골몰했다.
'하얀전쟁'은 참전을 비판한 사실상 첫 번째 영화였다. 대다수 배우가 꺼릴 수밖에 없는 영화에 당시 최고 흥행 배우 중 한 명이었던 안성기가 출연했다는 건 배우로서 그가 가진 특별한 소신을 보여주는 일이었고, 영화계는 안성기의 이 결정에 반색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배우가 단순히 엔터테이너가 아니라 엔터테이너이면서 동시에 지식인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하얀전쟁'은 한국영화가 흥행을 동력 삼아 상업적 성장을 막 폭발시키던 시기에 예술로서 영화라는 또 다른 축을 유지하고 지켜내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회 주목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알려지는 데는 슈퍼스타 안성기의 영향력이 있었다.
◇'투캅스' 형사버디무비의 출발점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는 안성기가 어떤 장르에서 어떤 캐릭터를 맡든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는 배우라는 걸 보여준 영화였다. 한 때 누구보다 정의로운 형사였지만 이젠 부패버리고만 조형사를 맡은 안성기는 기존에 진지하고 중후한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박중훈과 함께 코믹 콤비 연기를 선보이며 극찬을 받았다.
안성기가 모든 감독의 총애를 받은 배우였다는 건 '투캅스'가 '하얀전쟁' 이듬해 나왔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강우석 감독은 당대 최고 흥행 감독. 정지영 감독은 대표적인 사회파 감독이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배우 안성기의 역량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안성기는 그들의 믿음에 120% 보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투캅스'는 안성기 이미지를 전환해준 영화이면서 동시에 한국영화사의 이정표와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투캅스'는 형사버디무비의 출발점이자 액션코미디 영화의 효시였다. 대규모 자본을 투입한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시작점이었으며 블랙코미디 영화 확장의 촉매제였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한국영화 최고의 장면

한국영화 최고의 장면을 얘기할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안성기와 박중훈의 주먹이 교차돼 서로의 얼굴에 꽂히는 빗속 결투 장면이다. 이명세 감독이 1999년 내놓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 작품에서 안성기는 신출귀몰한 살인마 장성민을 맡아 또 한 번 새로운 얼굴을 꺼내들었다.
트렌치코트에 선글라스를 낀 장성민은 피도 눈물도 없는 카리스마를 가진 캐릭터. 앞서 안성기는 어떤 인물을 맡더라도 특유의 인간미를 불어넣는 연기를 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선 자신의 인장과도 같은 연기를 버리고 인간성을 배제하는 완전히 새로운 연기로 극을 장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한국 액션누아르 영화의 새로운 미학을 창조했다는 극찬을 끌어내며 걸작 중 걸작으로 평가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개봉한지 25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이 영화를 뛰어넘는 스타일을 보여준 영화는 없다는 게 중론이다.
◇'실미도' 1000만 관객 신화의 시작

한국영화 1000만 관객 신화가 시작되는 그 순간에도 안성기가 있었다. 강우석 감독이 2003년 발표한 '실미도'는 한국영화 최초의 1000만 영화였다. '실미도'가 1000만명이라는 숫자를 끌어안은 뒤 '태극기 휘날리며'(2004) '왕의 남자'(2005) 등 1000만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 수치와 함께 한국영화는 코로나 사태 직전인 2019년까지 매년 큰 폭으로 성장하며 전성기를 내달렸다. 다시 말해 안성기는 한국영화를 전성기로 밀어 올린 장본인이었다.
최재현 준위를 연기한 안성기는 분명 조연이었다. 그런데도 주연인 설경구·정재영보다 관객에게 더 깊이 각인됐다. 냉정해 보이나 따뜻한 속을 가진, 안성기만이 할 수 있는 어른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 안성기의 "날 쏘고 가라"는 대사는 온갖 형태로 패러디 되며 남녀노소 불문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라디오 스타' 영화가 된 그 미소

앞서 언급한 영화 7편과 비교하면 아마도 이 영화는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작품보다 이 영화 속 모습으로 안성기를 기억하는 관객이 많을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2006년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 안성기는 한 때 최고 가수였던 최곤의 매니저 박민수를 맡아 배우의 얼굴이 만들어내는 파토스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연기를 했다. 박민수는 최곤을 때로는 친구처럼 친근하게, 떄로는 형처럼 따끔하게, 때로는 아버지처럼 엄하게 대한다. 그리고 최곤을 향한 박민수의 감정과 박민수라는 캐릭터의 인격은 안성기의 얼굴을 통해 낱낱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인간적인 캐릭터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를 보면 된다.
그리고 우린 빗속에서 우산을 기타 삼아 튕기며 활짝 웃어 보이는 그 미소로 배우 안성기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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