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압박 시간 벌었지만…짙어진 'R의 공포'에 돌파구 안보인다

[세종=뉴시스] 안호균 박광온 기자 = 한국과 미국이 첫 고위급 관세 협의를 마쳤다. 우리측 대표로 미국을 방문한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미국 측에 상호관세와 품목별 관세의 면제를 요청했다.

이를 위해 ▲관세·비관세 조치 ▲경제 안보 ▲투자협력 ▲통화(환율) 정책 등 4가지 분야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가자는 협의의 틀이 도출됐다.

한국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상호관세 유예 조치가 종료되는 7월 8일까지 '7월 패키지(July Package)'라는 이름의 합의안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미국도 이 방안에 공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은 다음주부터 분야별 실무 협의와 고위급 협의를 이어가게 된다.

이번 통상 협의에 임하는 한국과 미국은 입장이 크게 달랐다. 탄핵 사태로 6월 조기 대선을 앞두고 있는 한국은 차기 정부에서 최종적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대화의 속도를 늦추려 했다. 하지만 관세 조치로 국내외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미국은 최대한 빨리 성과를 도출하길 희망했다.

정부는 조선·에너지 등 협력을 제안하는 한편 국내 정치 일정 등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미국을 설득했다. 결국 7월 8일까지는 시간을 벌었다. 미국의 관세 조치 면제를 위한 최종적인 협상과 합의는 차기 정부가 주도하게 됐다. 일단 미국발 통상 전쟁이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는 상황은 피했다는 평가다.

이번 한미 통상 협의 결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확고한 의사결정 권한을 가지지 못한 현 정부가 최종 결정을 대선 후로 늦춘 것은 바람직한 전략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권한대행 체제에서 결정권을 유보한 채 틀만 설정한 것은 유연한 협상 전략으로 볼 수 있다"며 "'협상은 빨리 시작하고 결론은 늦게 내려라(Negotiate early, decide late)'는 원칙처럼, 사전 논의는 충분히 하되 정치적 부담이 적은 시점에 최종 결정을 넘기는 방식은 리스크 관리에 효과적이다. 협상의 장기성과 정권 이행기의 연속성을 보장하려는 전략적 설계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합의를 전혀 도출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아무 일도 한 게 없다. 아마 우리나라의 정치 일정을 설명하고 향후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정도의 이야기로 끝낸 거 같다. 야당의 요구에 굴복한 준비 없는 면피용 방미였다"며 "방위비 문제는 우리가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므로 미국 측에서 요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관세 문제만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고, 향후에 또 방위비 문제를 얘기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현재 우리 경제 상황이 엄중한 점도 '맹탕 합의'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다. 그만큼 미국의 관세 조치는 최근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부상했다. 미국의 상호관세는 유예됐지만 철강, 자동차 등 품목별 관세는 발효 상태에 있고, 수출 관련 불확실성으로 인한 기업 심리 위축도 현재 진행형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22일 발표한 '세계경제전망'에서 우리나라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1.0%로 전망했다. 지난 1월 보고서(2.0%)보다 1.0%포인트(p)나 수치를 하향조정했다. 12·3 비상계엄에 따른 내수 위축과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의 영향을 반영한 결과다.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는 주요국 중 멕시코(1.7%p)와 태국(1.1%p)에 이어 세번째로 하향조정폭이 컸다. 그만큼 우리 경제의 수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1.0%의 경제성장률은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였던 2020년(-0.7%) 이후 가장 낮고,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0.8%)과 비슷한 수준이다.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마이너스(-0.2%)를 기록하면서 경기 침체에 대한 공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는 경기 부진의 원인이 내수에 있었다면 올해 들어서는 수출까지 하향 곡선을 그릴 가능성이 커졌다. 올해 1분기 수출은 전 분기 대비 1.1% 감소했다.

이 때문에 한미 통상 협의를 마치고 귀국하는 최상목 부총리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한미간 통상 협의는 일단 두 달 이상의 시간을 벌었지만, 미국의 관세는 계속 불확실성 요인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내수와 수출의 동반 부진을 반전시킬 수 있는 돌파구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정부는 지난 18일 12조2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재해·재난 대응, 통상·AI, 민생 지원 등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른바 '필수 추경'이다.

하지만 국회 심사 과정에서 이번 추경이 심각한 경제난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추경을 15조원까지 증액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경기 침체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추경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재정 투입과 금리 인하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외 불확실성은 우리의 의지만으로 해소할 수 없는 만큼 국내 경기 부진을 해소하기 위한 확장적인 정책 대응이라도 먼저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한 발 늦었다. 1월에 추경을 했어야 했다"며 "이 상태로 가면 내수, 특히 자영업은 올해 사상 최대로 충격을 받을 것"이라며 "일단 지금의 추경안이라도 통과시키고 바로 다시 재논의를 해야한다. 30조원 규모 정도는 돼야 내수 진작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장은 "지금 금리가 낮은 수준이 아닌 만큼 통화정책이 조금 더 여지가 있다고 본다"며 "일단 12조원 규모의 추경이 국회에서 빨리 통과돼야 하고, 이후 대외 충격이나 내수 부진이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추가로 추경을 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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