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오란 샤쓰'~, 한 때 애국가보다 많이 불려"
1960년대 풍미하며 아시아 순회공연도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등 작곡가 손석우와 히트곡 양산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1960년대 국내 대중음악 흐름을 바꾼 불멸의 히트곡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주인공인 가수 한명숙이 별세했다. 향년 90.
22일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 등 가요계에 따르면, 한명숙은 지병으로 이날 눈을 감았다.
1935년 12월1일 평남 진남포에서 출생한 고인은 1950년 6·25 당시 모친과 단 둘이 부친을 찾아 피난민 대열에 합류해 남한에 왔다.
16세 때 인천에 정착한 뒤 악극단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 우에노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학)를 나온 외삼촌 김재섭의 평양음대 제자인 드러머 이원근의 추천으로 '태양악극단'에 들어가면서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아울러 군예대(軍藝隊)에도 참여, '군번 없는 용사'로 참전했다.
실력을 점차 인정받으면서 미8군 쇼 단체인 '럭키쇼단'에 스카웃됐다. 이후 세븐스타쇼, 에이원쇼 등으로 활동을 넓혀 나갔다. 특히 안정된 허스키 보이스는 팝 가창에 맞는 음색으로 미군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 인기와 유명세를 몰아 미국 톱가수 패티 페이지가 내한했을 때 함께 무대에 오르는 행운도 안았다.
22일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 등 가요계에 따르면, 한명숙은 지병으로 이날 눈을 감았다.
1935년 12월1일 평남 진남포에서 출생한 고인은 1950년 6·25 당시 모친과 단 둘이 부친을 찾아 피난민 대열에 합류해 남한에 왔다.
16세 때 인천에 정착한 뒤 악극단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 우에노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학)를 나온 외삼촌 김재섭의 평양음대 제자인 드러머 이원근의 추천으로 '태양악극단'에 들어가면서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아울러 군예대(軍藝隊)에도 참여, '군번 없는 용사'로 참전했다.
실력을 점차 인정받으면서 미8군 쇼 단체인 '럭키쇼단'에 스카웃됐다. 이후 세븐스타쇼, 에이원쇼 등으로 활동을 넓혀 나갔다. 특히 안정된 허스키 보이스는 팝 가창에 맞는 음색으로 미군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 인기와 유명세를 몰아 미국 톱가수 패티 페이지가 내한했을 때 함께 무대에 오르는 행운도 안았다.
한명숙은 인복도 넘쳤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던 그녀를 위해 음악평론가 이백천이 나섰다. 당시 미8군 무대에서 알토 색소폰 주자로도 활동하며 외국 노래들을 녹음해주고 일일이 가사를 적어줬다. 또 미국 토크쇼 '자니 카슨 투나잇쇼'에 출연해 유명했던 MC 쟈니윤이 한명숙의 매니저 일을 봐주기도 했다.
그러다 1961년 가수 최희준의 소개로 거물 작곡가 손석우를 만나 변곡점을 겪었다.
같은 해 손 작곡가가 쓴 힐빌리(초기 컨트리음악 스타일) 리듬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로 데뷔 즉시 스타덤에 올랐다.
발표 당시 일부 가요 관계자들로부터 "동요에 털이 좀 난 것뿐"이라는 악평도 받았지만 바로 그 '파격'으로 말미암아 대중음악사 분기점에 놓인 곡이다. 이 곡을 기점으로 '미성(美聲) 가수들의 시대'가 '개성가수들의 시대'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1961년 가수 최희준의 소개로 거물 작곡가 손석우를 만나 변곡점을 겪었다.
같은 해 손 작곡가가 쓴 힐빌리(초기 컨트리음악 스타일) 리듬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로 데뷔 즉시 스타덤에 올랐다.
발표 당시 일부 가요 관계자들로부터 "동요에 털이 좀 난 것뿐"이라는 악평도 받았지만 바로 그 '파격'으로 말미암아 대중음악사 분기점에 놓인 곡이다. 이 곡을 기점으로 '미성(美聲) 가수들의 시대'가 '개성가수들의 시대'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박 평론가는 "미8군 무대가수들이 대거 일반무대로 진입하는 자극제가 된 동시에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가요의 주류로 부상하는 기폭제가 됐다"고 짚었다.
특히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를 강타했다. 이에 따라 한명숙은 '한류 1호 가수'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 곡은 해외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면서 민간 외교에도 한몫 했다.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Yvette Giraud)가 1963년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공연을 열었을 당시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른 것이다.
지로는 이후 자청해서 뷔너스레코드사를 통해 한국어로 이 음반을 취입했다. 일본 가수 하마무라 미치코를 비롯 자국의 가수들 목소리에 제각각 실려 일본과 동남아도 강타했다. 이른바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특히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를 강타했다. 이에 따라 한명숙은 '한류 1호 가수'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 곡은 해외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면서 민간 외교에도 한몫 했다.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Yvette Giraud)가 1963년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공연을 열었을 당시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른 것이다.
지로는 이후 자청해서 뷔너스레코드사를 통해 한국어로 이 음반을 취입했다. 일본 가수 하마무라 미치코를 비롯 자국의 가수들 목소리에 제각각 실려 일본과 동남아도 강타했다. 이른바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 붐은 영화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다. 1962년 3월 엄심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당시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을 만큼 흥행했다. 한명숙은 당대 최고 배우들인 엄앵란, 신성일과 함께 이 영화의 주연을 맡았다.
이 곡엔 재미난 에피소드도 여러 얽혀 있다. 유행할 당시 외국인이 길가다가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나오자 갑자기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 외국인은 이 곡이 하도 많이 울려 퍼져 대한민국 국가인 줄 알았다고 했다.
박 평론가는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한때 애국가보다 많이 불렀던 노래로 기억된다. 이 곡을 시작으로 한명숙은 너나없이 궁핍했던 시절, 아름다운 노래로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줬다"고 기억했다.
1960년대는 한명숙의 전성기다. 손 작곡가와 손잡고 발표한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검은 스타킹' '시름의 꼬리별이' '센티멘탈 기타' '선유가' '상한 갈대를 꺾지 마라' 등이 잇따라 히트했다.
이 곡엔 재미난 에피소드도 여러 얽혀 있다. 유행할 당시 외국인이 길가다가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나오자 갑자기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 외국인은 이 곡이 하도 많이 울려 퍼져 대한민국 국가인 줄 알았다고 했다.
박 평론가는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한때 애국가보다 많이 불렀던 노래로 기억된다. 이 곡을 시작으로 한명숙은 너나없이 궁핍했던 시절, 아름다운 노래로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줬다"고 기억했다.
1960년대는 한명숙의 전성기다. 손 작곡가와 손잡고 발표한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검은 스타킹' '시름의 꼬리별이' '센티멘탈 기타' '선유가' '상한 갈대를 꺾지 마라' 등이 잇따라 히트했다.
해외공연 또한 많았다. 일본을 비롯해 홍콩, 싱가폴,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등을 돌았다. 각 방송국 PD들이 그녀가 해외에서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데려가는 이른바 '모시기 경쟁'도 치열했다. 최전방 위문공연은 물론 파월장병을 위한 위문공연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다.
전성기 시절 한명숙에게 붙은 별명은 '왕대포'와 '감초' 두 개다. 구수하고 걸쭉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동료 블루벨즈가 지어준 별명이 왕대포다. 어느 곳에서든 늘 해결사 역할을 도맡아 한다고 해서 감초라고도 불렸다. 그 만큼 동료들과의 유대관계 또한 돈독했다고 박 평론가는 전했다.
현모양처로 단 한 번도 스캔들이 없었다. 6·25 동란 군예대 시절에 만난 군악대 소속 트럼펫 연주인 이인성과 1956년 1월에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이 이른 나이인 41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 뒤 2남1녀의 자녀를 홀로 키웠고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도 동시에 모시고 살았다. 2007년엔 사글세 단칸방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져 최백호 등 선후배 가수들이 그녀를 돕기도 했다.
가족에 대한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1978년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고 2000년 국민문화훈장을 수훈했다. 2003년 KBS 가요대상 공로상을 받았다. 2010년엔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가 '한명숙 헌정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원로가수회 거목회, 종군참전연예인협회 회원 등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딸 이은경 씨와 차남 이일준 씨 등을 뒀다. 빈소 수원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장례식장 3호실(조문 23일부터 가능), 발인 26일 오전 8시40분. 031-249-8444.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전성기 시절 한명숙에게 붙은 별명은 '왕대포'와 '감초' 두 개다. 구수하고 걸쭉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동료 블루벨즈가 지어준 별명이 왕대포다. 어느 곳에서든 늘 해결사 역할을 도맡아 한다고 해서 감초라고도 불렸다. 그 만큼 동료들과의 유대관계 또한 돈독했다고 박 평론가는 전했다.
현모양처로 단 한 번도 스캔들이 없었다. 6·25 동란 군예대 시절에 만난 군악대 소속 트럼펫 연주인 이인성과 1956년 1월에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이 이른 나이인 41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 뒤 2남1녀의 자녀를 홀로 키웠고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도 동시에 모시고 살았다. 2007년엔 사글세 단칸방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져 최백호 등 선후배 가수들이 그녀를 돕기도 했다.
가족에 대한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1978년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고 2000년 국민문화훈장을 수훈했다. 2003년 KBS 가요대상 공로상을 받았다. 2010년엔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가 '한명숙 헌정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원로가수회 거목회, 종군참전연예인협회 회원 등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딸 이은경 씨와 차남 이일준 씨 등을 뒀다. 빈소 수원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장례식장 3호실(조문 23일부터 가능), 발인 26일 오전 8시40분. 031-249-8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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