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무자비한 냉소의 묵시록 '부고니아'

기사등록 2025/11/06 06:03:00

영화 '부고니아' 리뷰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억울하겠지만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필모그래피 내에서 영화 '부고니아'(11월5일 공개)는 범작에 가깝다. 2009년 '송곳니'를 시작으로 2023년 '가여운 것들'까지 란티모스 감독은 최근 10여년 간 가장 파괴적이면서 완성도 높은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작가이자 연출가. 평범한 감독이 '부고니아' 정도 되는 작품을 내놨다면 아마도 커리어 하이라는 평가를 받을 테지만, 이제 란티모스 감독 영화를 향한 기대는 매번 걸작에 가까운 그 무엇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괴작이라도 되길 원한다. '부고니아'가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의 리메이크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한계다. 란티모스식(式) 연출로 재창조하고 그만의 시각으로 전환한 영화인 건 명백하나 원작의 자장은 20년이 넘어서도 약해질 기미가 없다.

하층민 노동자가 막대한 권력의 자본가를 지구 존립을 위협하는 외계인으로 여겨 납치·감금·고문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하는 건 같지만, 일단 이야기가 궤도에 오르면 '부고니아'는 '지구를 지켜라!'와 다른 경로로 달린다. 말하자면 '부고니아'는 '지구를 지켜라!'의 버전업(version up)이다. 원작이 병구의 시선에서 신자유주의와 자본 권력의 횡포를 결국 폭발하고만 광기로 난도질한다면, 리메이크작은 양극화를 뉴노멀로 설정한 뒤 제3자의 시각에서 혐오·음모·반지성·계급·젠더 등 20여년 전엔 희미했으나 오늘날 시급해진 이슈들을 조소와 냉소를 가득 머금은 채 관찰한다. 장 감독이 병구를 연민하고 만식에 분노했던 것과 달리 변화된 시점과 달라진 시대에 따라 란티모스 감독은 누구도 동정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화내지 않는다.

HBO 시리즈 '석세션'의 작가 윌 트레이시가 각본을 쓴 '부고니아'는 란티모스 감독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직접적인 풍자극이다. 전작에서 신화를 차용하고 고전을 변주하며 우화를 경유하는 등 주로 간접 형식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파고들었던 그는 신작에서 현재 미국 사회, 더 나아가 바로 지금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각종 위기의 행태를 직접 전시한다. 일례로 미셸은 정치적 올바름으로 가장한 합리주의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테디는 궤변과 음모론으로 중무장한 채 자신보다 정신적으로 약한 이들을 가스라이팅한다. 그리고 양극단에서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인 이들은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미셸은 탈진실의 화신, 테디는 반지성의 아이콘. 미셸은 생태주의의 적이고, 테디는 극우의 선봉이다.

다만 란티모스만의 판타지, 란티모스만의 심연을 지지해온 이들에게 대놓고 벌이는 '부고니아'의 너른 풍자는 도무지 탐탁치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이 영화엔 란티모스 감독이 '더 랍스터'(2015)나 '킬링 디어'(2017) 등에서 보여준 묵시록적이고 종말론적 분위기가 그득하고, '지구를 지켜라!'와는 달리 란티모스 영화 특유의 건조하고 차가운 기운이 러닝타임 119분 내내 서려있다. 하지만 스타일을 상호보완하는 이렇다 할 통찰을 내보이지 못한 상태에서 시대의 문제들을 개괄하며 판단을 보류한 채 거리두기 하는 태도는 다소 과장해서 얘기하면 직무유기처럼 보인다. 러닝 타임의 상당 부분이 미셸과 테디의 대화 장면인데다 이들의 대사로 거의 모든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은 우리가 이전에 알던 란티모스 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부고니아'의 약점을 보완하는 건 엠마 스톤과 제시 플레먼스다. 이제는 란티모스 감독의 페르소나로 부르는 게 적절할 듯한 스톤은 자신이 왜 마흔 살이 채 되기 전에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두 차례나 품에 안았는지 증명하는 듯한 카리스마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영화와 연기를 위해서라면 머리를 밀고 피를 뒤집어 쓰는 것쯤은 대단치도 않다는 듯한 그는 강만식보다 더 징그럽고 치밀한 미셸로 그때 그 백윤식의 잔상이 남지 않는 폭발력과 냉혹함을 선사한다. 플레먼스는 머지 않아 그가 오스카를 손에 넣게 될 거라고 확신하게 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여전히 우리는 20여년 전 신하균이 보여준 미치게 슬픈 눈빛을 사랑하겠지만, 플레먼스가 재해석해 내놓은 광기의 정중동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순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결국 '부고니아'의 마지막 시퀀스에 관해 얘기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란티모스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의 에필로그를 본 뒤 그것을 갱신하기 위해 리메이크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는 지구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 지긋지긋한 종 그 자체에 있다는 것. 새로고침 하긴 했으나 리메이크가 원작의 가차 없는 주장과 결론에 대체로 동의하면서 그것을 계승·변주하려 하고 있다는 점은 '지구를 지켜라!'의 아우라가 22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낡지 않고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의미할 게다. 그렇다면 '부고니아'의 한국어 제목을 '지구인을 지켜라!'로 다시 붙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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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필름]무자비한 냉소의 묵시록 '부고니아'

기사등록 2025/11/06 06:03:00 최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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