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1200만 관객 영화 '국보' 리뷰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영화 '국보'(11월19일 공개)는 감격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 매혹을 예찬하지 않는다. 대신 인정한다. 이런 삶도 있다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고. 춤으로 얻어낸 '인간 국보(國寶)'라는 칭호는 영예로우나 그 성취를 영화는 멋대로 추어올리지 않는다.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어쩌면 차라리 속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가부키의 영화이고 가부키 배우의 영화다. 다만 기어이 굴레의 영화가 되기도 한다. 그게 아니라면 만기쿠가 고독 속에 죽어가고, 한지로가 피 토하며 쓰러지며, 슌스케가 병든 채 산화하고, 키쿠오가 고통에 몸부림 치며 춤춰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들의 인생이라는 건 가부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 같은 게 아니라 가부키가 어느새 그들을 집어삼켰다는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야쿠자 오야붕의 아들인 키쿠오가 부모를 잃은 뒤 가부키 집안에 편입돼 그 가문의 장자인 슌스케와 함께 가부키 배우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 '국보'는 일단 가부키를 경애한다. 러닝타임 175분 중 키쿠오가 한지로의 제자가 되기까지 과정을 그린 초반부 일부 장면을 뺀 나머지 상영 시간은 온통 가부키에 젖어 있다. 키쿠오와 슌스케의 삶은 공연 아니면 연습이고, 약 40년에 걸친 세월의 굴곡과 변곡점에 죄다 가부키가 있으며, 그들 생의 만감 역시 결국 가부키에서 온다. 이상일 감독은 가부키 배우의 인생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이토록 긴 러닝타임으로, 이 시간의 사실상 전부를 그 춤에 관해 얘기하는 것으로 에둘러 드러낸다. 그리고 그 삶을 경외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부키와 배우를 향한 존중을 '국보'는 전력투구로 완성한 공연 시퀀스로 담는다. 영화는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 <도죠지의 두 사람> <소네자키 동반자살> <백로 아가씨> 등을 통해 가부키의 겉과 속을 아우르는 미학의 극치를 표현한다. 이 공연 예술에 관해 아는 게 없어도 일단 이 장면들을 보고 나면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목격했다고 직감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국보'는 가부키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키쿠오와 슌스케의 공연은 그들의 일생과 맞물려 돌아가며 폭발하고 반복되며 사그라든다.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는 두 배우의 부상(浮上)을, <도죠지의 두 사람>은 동반자로서 이들의 운명을 상징한다. <소네자키 동반자살>은 엇갈리면서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들의 심난한 관계를, <백로 아가씨>는 정점의 온나카타로서 키쿠오의 고통을 표상한다.
당연히 '국보'는 말 그대로 혼신을 바치고야 마는 예술가의 영화다. 이 작품은 독보적 예술혼이란 그것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키쿠오는 정말 그렇게 산다. 그는 가부키를 뺀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 절정의 경지를 위해 여자는 가당치 않고, 자식 따윈 필요 없다. 어떤 오욕도 어떤 영광도 모두 짊어진 채 그저 단독자로서 연기하고 춤춘다. 다시 말해 키쿠오라는 인간은 무아지경 속에서 배우로만 존재해야 한다. 그는 자신에 앞서 인간 국보로 불렸던 만기쿠를 "괴물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괴물이다"고 했다. 말하자면 궁극에 도달한 예술가란 괴물이나 다름 없다고 '국보'는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괴물일지라도 아름답지 않으냐고 경탄한다. 그렇게 키쿠오 역시 기어코 아름다운 괴물이 되고야 만다.

요시다 슈이치 작가가 2019년 내놓은 동명 소설이 원작인 '국보'는 문신과 피의 영화이며, 재능과 병(病)의 영화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어떤 것도 동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상찬하지 않는다. 야쿠자 집안의 문신이 있는 키쿠오에겐 가부키 가문의 피는 없지만 하늘이 준 재능이 있다. 가부키 가문의 피가 있는 슌스케에겐 키쿠오의 천재는 없어도 혈통은 언제나 그의 뒷배가 돼준다. 문신은 키쿠오를 추락시키고, 피는 슌스케를 좀먹는다. 키쿠오는 재능으로 부활하고, 슌스케는 병으로 개안한다. 그러니 키쿠오가 국보가 됐다고 해서 재능이 혈통을 극복했다고 말하는 건 오독이다. 다른 팔자를 타고난 이들이 같은 꿈을 꿨고, 두 온나카타(여성 캐릭터를 맡는 남자배우)의 삶이 기막힌 우연으로 얽히고설켰을 뿐이니까 말이다.
슌스케를 연기한 요코하마 류세이를 비롯해 이 영화의 배우들은 하나 같이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그래도 결국 '국보'는 요시자와 료의 것이다. 이 작품을 위해 1년 6개월간 가부키를 연마한 요시자와는 키쿠오의 노력·환희·의지·정신·좌절·고독·설움·슬픔·위악·냉정·분노를 마치 직접 목격한 것처럼 연기한다. <소네자키 동반자살> 첫 공연을 앞둔 키쿠오가 슌스케에게 "네 피를 마시고 싶다. 내겐 나를 지켜줄 피가 없다"고 말하는 대목은 아마도 그의 필모그래피에 영원히 남을 장면이다. <백로 아가씨>에서 키쿠오가 보여주는 저 애처로운 몸짓은 어디에라도 그가 살아가고 있다고 믿게 되는 실감을 선사한다. 어쩌면 가부키를 향한 키쿠오의 갈망은 키쿠오를 향한 요시자와의 열망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6월 일본 현지에서 개봉한 '국보'는 관객수 1200만명을 넘겼고, 매출액은 170억엔(약 1700억원)을 돌파했다. 이 추세라면 일본 실사영화 역대 1위 흥행작인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2-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2003)를 넘어 새 역사를 쓰게 될 거로 예상된다. 일본에서 실사영화 1000만 관객은 23년만에 나온 기록이기도 하다. '국보'는 일본 영화계 상식으로 보면 1000만 관객은커녕 절대 흥행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가부키라는 올드한 소재, 흔히 말하는 오락적 요소 없이 시종일관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 게다가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TV시리즈의 극장판도 아니었다. 그런데 '국보'는 보란 듯 판을 뒤집었다. 이 성공은 길을 잃고 헤매는 듯한 최근 한국영화계에 죽비를 내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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